주식회사 두번째 이야기, 주식회사제도는 한국에 어떻게 이식되었을까.

이번부턴 솔직히 나 같은 뜨내기가 아닌 역사학자의 도움을 받아야 제대로 된 글을 쓸 수 있다.

왜냐하면 한국에서의 주식회사제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구한말 자본의 원시축적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이것이 회사제도로 발전하는 과정에 어떻게 기여했는지 이해해야 할텐데 이과정에 일제강점기라는 outlier가 발생하였고, 이 기간동안 사회적으로는 노비 및 상반제도가 무너지는 과정을 중첩적으로 거치는 등 매우 짧은 시간에 너무나 많은 구조적변화를 복합적으로 겪게 되었기에 당시의 need와 이해관계만으로도 주식회사를 설명할 수 있는 유럽과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아… 벌써부터 머리가 아프다. 내가 왜 이 복잡하고 어려운 짓을 시작했나 후회가 된다 ㅠㅠ. 지난번 시작한 양자역학 진도도 절반도 못나갔는데 …

해서, 그냥 거두절미하고 하고 싶은 이야기만 해야겠다. 내가 느끼고 있는 핵심에 가장 가까이 접근하는게 중요하니까.

솔직히 한국은 주식회사제도가 서구에서와 같이 사업주와 자본가의 이해관계 속에서 주체적으로 형성된게 아니라 그냥 강점기를 통해 강제로 일본 제도가 임플란트된 케이스이고, 일본의 주식회사는 동인도회사의 복제판이었으므로 사실 내용으로는 대동소이 하다고 봐도 좋다. 따라서 문제는 제도 자체가 그것이 받아들여지 과정에 있었다 본다.

즉, 주식회사제도의 특징인 소유과 경영의 분리라는 대전제가 처음부터 먹히기 어려웠던게, 구한말까지 형성되어 왔던 한국의 부(富, 아마도 대표적인 예가 경주 최부자라던가 일부 개성상인 등)는 강점기 일본자본에 의해 거의 자취를 감추었고, 일본자본의 근본이 당시 제국주의의 대륙식민지 진출을 위한 국가중심(국가+황실+일본자본가)의 기업이었다는 점에서 형태만 주식회사의 구조일 뿐 대부분 일본 군국주의 확장을 위한 수탈 전문기업이라고 보는게 맞을 듯 하다.

이의 대표적인 예가 1908년에 설립된 동양척식주식회사인데 이 회사의 기본모델이 다름아닌 동인도회사이지만 인도에서 와는 달리 사업주, 자본가 모두 일본 군국주의 (이걸 국가독점자본주의라카나?) 집단라는 점이 큰 차이가 아닐까 싶다. 그런 점에서 한국 주식회사에서의 모호한 사업가-자본가 구조(미분리)는 아마도 여기서 태동되었는지도 모른다.

따라서, 모르건데, 식민지를 경험했던 이전 세대들에게 있어 [주식회사 = 국가 또는 지배자] 즉, 이해관계 집단이 아닌 권력/지배세력 집단의 이미지가 강하게 스며들어 있을 것으로 생각되며 이러한 이미지는 후대를 거쳐 지금까지도 영향이 남아 법제도와는 무관하게 한진오너 갑질의 심리적 밑밥이 되어주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럼, 이 지점에서 갑질이야기가 나왔으니 한국역사, 특히 신분제도 변화의 특수성을 다시한번 들쳐봐야 한다.

오늘은 여기까지… 갈수록 태산이다…

PS:

주식회사 바로알기 세번째 이야기(구한말 신분제도와 회사제도)를 주말에 정리해 두었는데… 다시 읽어보니 올릴 자신이 없다.

글이 잘못되어서가 아니라 우리나라 기업문화의 오리진이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현실과 너무 닮아 있는데다가 구한말 신분제도의 굴레를 그대로 껴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이 우리의 추한 민낯을 되돌아봐야 하는데, 이런걸 그냥 페북에 싸지르는 것은 – 이미 다 알고 있는 이야기임에도 – 우리의 오리진 일체를 무차별적으로 부정하는 무책임한 배설행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기에는 아직 우리나라에 “기업가(Entrepreneur)”로서의 본분을 다하려는 분들이 많이 계신다. 해서, 신분제도 이야기는 그냥 빼기로 했다.

다음편은 우리가 법에 의해 약속되어진 룰을 따른다면, 그리고 절대다수의 주주(이건 최대주주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와 회사의 미래를 공유하는 사람들의 이해에 기반한다면 회사는 어떻게 굴러가는 것이 맞는 것인지에 대해 우리 모두가 이미 다 알고 있는 이야기로 이 지루한 스스로의 복습과정을 마치고자 한다.

# 2018.4월부터 3차례에 걸쳐 페이스북에 포스팅했던 주식회사 바로알기 관련 글들이다. 페북의 가장 큰 단점인 자신글 검색곤란 때문에 블로그로 옮겨 적는다.

요즘 재벌 갑질이 화두가 되면서 한편으로 주주의 권리, 이사회의 기능, 이사의 책무 등에 대한 기사들도 간혹 올라오고는 있지만 여전히 대부분의 기사들은 ‘오너일가의 인간성’에만 집중되고 있는게 현실이다. 그럼 인간성 좋은 오너가가 있는 재벌은 괜챦다는건가?

그래서 시간날때마다 주식회사라는 제도, 한국에서의 이식과정 등을 살펴보고 왜 현재 한국의 주식회사가 또는 그 거대 확장형인 재벌이 왜 이런 모습을 가지게 되고 국민들은 왜 이렇게 바라보게 되었는지 끄적거려보기로 했다.

때문에 그냥 생각가는대로 짬짬이 쓰게 될터이니 두서가 없을 듯 하다. 덕분에 생각도 정리해보고…

그 첫편으로 역사책에 나오는 주식회사제도를 찾아보았다. 
역사적으로는 고대 로마의 퍼블리카니(publicani)라는 형태를 이야기하지만 근대적으로는 모두들 대항해시대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를 그 기원으로 보고있다.

즉, 해상운송이라는 당시로서는 매우 리스키한 대형사업에 다수의 투자자를 모으는 방식에서 유래했다는 것인데 처음에는 높은 배당수익이 관심을 끌었지만 암스테르담 곡물거래소를 본딴 증권거래소가 설립되면서 부밍이 되어 회사의 대표적인 형태로 자리잡게 되었다고 한다.

아시다시피 주식회사제도는 원금손실에 대한 책임이 없으니 사업주도 은행대출과는 다르게 좀더 공격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재원이었으므로 당시 해상무역을 중심으로 다양한 물품과 형태의 무역거래가 융성하게 되는데 중요한 모험자본(Venture capital)을 형성해 준 것이다.

이 와중에 재빠른 유태인 금융자본가들이 사업주를 대신하여 bond라는걸 발행해서 자금을 공급해주는, 향후 근대적 투자은행(IB)의 underwriting업무를 시작한 때도, 항해의 위험을 담보해주는 보험업이 태동한 것도 이즈임이었다.

따라서 이들 사업주가 계속기업으로써 credit을 쌓아가고 profitable한 사업가임을 증명하는 유일한 길은 좀더 새로우면서 매혹적인 상품들을 식민지에서 찾아내어 좀더 크게 유럽에 공급하는 일이었고 이게 그냥 사업가들의 nature였던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바로 유통될 수 있는 주식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경영과 주주가 분리되어야한 했다는 것이다. 주주가 주식을 팔어 다른주주가 주인이 되더라도 경영(사업주)은 무관하게 지속되어야만 했기 때문이다. 이전까지는 합명회사에서와 같이 경영자 = 주주이기 때문에 지분을 빼게 되면 계속기업으로서 문제가 발생할 수 밖에 없었고 새로운 투자자를 영입하기도 어려웠다.

하지만 주주들이 생각하기에 사업주가 영 경영을 못해서 주식가치를 떨어뜨리고 있다고 판단된다면 사업주를 갈아버릴 필요도 있기 때문에 대다수 주주의 의견을 물어보는 주주총회도 생겼을 것이고,이사회라는 전문가 의결기구를 내부에 만들어 주주가 이사를 선임함으로써 사업주를 견제하면서도 좀더 전문적이고 대규모의 사업을 할 수 있게 되었을 것이다. (나중에는 이것도 못미더워서 이해관계자가 아닌 외부전문가를 ‘사외이사’라는 이름으로 이사회에 앉히고 감시하도록 했다)

결국 주식회사 사업주(이것이 우리가 흔히들 사용하는 ‘오너’라는 개념일 것이다)의 가치는 자기가 얼마의 지분을 가지고 있느냐가 아니라 스스로의 경영능력으로 주주들의 지지를 받느냐의 문제였기 때문에 사실상 서구에서 주식회사의 오너라는 개념은 매우 낯설을 수 밖에 없으며, 그것(사업주)이 자손에게 대물림된다면 주식회사라는 제도의 장점을 전혀 살리지 못하는 것은 물론 주주들이 이런 회사에 투자할 이유도 없게된다. 난 개똥이의 능력과 개똥이의 경영전략에 투자했지 내가 알지도 못하고 검증도 안되는 개똥이 아들이나 손자한테 투자한 일이 없기 때문이다.

아울러 사업주이면서 대주주인 개똥이나 개똥이 아들입장에서도 자신들이 가진 주식가치의 극대화를 위해 자신과 함께 일해온 사업가들과 시장의 뛰어난 인재들을 모두 재쳐버리고 그저 개똥이의 아들이라는 이유만으로 개똥이아들을 사업주의 자리에 오르게 할 이유가 전혀 없다.

너무 상식적인 이야기지만 이것이 바로 주식회사의 근본이다. 돈을 가진자와 사업을 잘하는 사람들이 만나 가장 합리적이고 전문적으로 돈을 불려나가는 방법 말이다.

다음에는 그런 주식회사가 우리나라에는 왜 지금의 모습이 되었을까 생각해보겠다.

우리주변에 day to day로 마주치게 되는 일상의 모든 것들은 그것이 좋든 별로던 그것만의 design을 가지고 있다.

기술의 진보와 보편화는 디자인의 중요성을 더욱 강조시켜 왔으며 소비자입장에서 무엇인가를 선택하는 중요한 요소로 부상하는 가운데 특히, value chain내 제조와 유통의 분리는 이를 더 가속화시켜왔다.

그렇다보니 과거 그저 만들기만하면 되었던 산업분야 -주로 산업/공공용 제품 등 B2B영역 – 에도 디자인이 서비스나 제품을 선택받게 되는 시대가 되었다. 그런데, 한국에 있어 디자인을 아직 부가적인 ‘노오력’의 영역으로 바라보는 기업들이 많고 – 이는 대부분 과점영역에서 두드러진다 – 전혀 개선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것 또한 현실이다.

워낙 많은 것들이 여기에 속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우리가 선택했다기보다는 우리에게 그냥 던져진 디자인이다보니 관심 꺼버리고 지나치는게 대부분인데, 비상식적인 것들을 보고 넘어가기엔 좀이 쑤시는 성격인지라 마주칠때마다 한번씩 꼬집어 봐야 직성이 풀릴 것 같다.

물론 이런게 가능해진건 전적으로 스마트폰의 덕이다. 디자인이라는 것들이 눈에 보이는 것이 많은지라 찍어 올리면 공감하기도 좋다.

그 첫번째 희생양은 매번 집을 들락거리면서 이용하게 되는 엘리베이터속에서  마주치게 되었다. 하루에 최소한 2번.

이 엘리베이터는 국내 H사 제조 제품이고 아마도 왠만한 신축건물, 또는 교체설치되는 대부분에서 볼 수 있을 정도로 흔하다. 때문에 흔하디 만큼 여러군데에서 욕을 먹고 있는 제품이기도 하다.

먼저 아래 사진을 먼저 보자.

내가 이런 형태와 기능의 버튼을 처음 본 것은 옛날 직장이던 산업은행에서 였다.

여의도로 본사를 이전하면서 아방가르드(?)한 건물디자인에 맞추어 엘리베이터도 혁신적인 디자인이 적용되었었다.

내기억으로 산업은행 제품은 H사가 아닌 K사나 L사 제품이었던 걸로 기억했는데 버튼 숫자에 LED 후광을 넣어서 누르면 불이 들어와 좀더 명확히 선택 층수를 볼 수 있게 만든, 당시로서는 매우 혁신적이었던 제품으로 기억되고, 이후 거의 모든 엘레베이터 버튼에 공통적으로 적용된 디자인이기도 하다. 다만, 산은의 버튼은 정말 혁신적이었던게 백라이트가 “파란색” 이었다.

문제는 이걸 제대로 만들면 이쁘고 기능적으로도 훌륭할텐데, 사진에서 보는 바와 같이 개념없이 만들면 이와같이 어처구니없는 디자인이 되고 만다.

좋은 디자인의 전제조건은 그것이 최소한 바라보기용이 아니라 기능적으로 보편타당해야하고, 특히 엘리베이터같이 안전과 깊게 관련되어 있고 일반인들이 오퍼레이팅하는 공공제품은 더욱이 기능적부분을 감안하여 디자인해야만 좋은 다지안이라 말할 수 있겠다.

따라서 엘리베이터 버튼의 디자인은 버튼의 목적 – 가고자 하는 목적 층을 선택 -을 달성하는데 합목적성을 달성할 수 있어야 한다.

특히 엘리베이터는 통상 혼자타지 않는 한 문이 닫힘과 동시에 작동된다는 점에서 버튼 조작을 위한 시간은 때때로 매우 제한적이다. 때문에 직관적으로 – 숫자의 배렬로 인해 – 층수를 파악할 수 있는 시인성이 매우 중요한 요소가 된다.

But, 특별히 말을 안해도 위 사진을 보면 느낌이 팍 올것이다. 잘 안보인다.

내 나이에 뵈도 이정도인데 노인층들은 어쩌겠는가. 사실 엘리베이터에 들어와서 버튼을 찾아 헤매는 노인분들을 수없이 보게 된다. 그나마 아파트같이 매일쓰게 되면 위치적 감이 있어서 실수를 덜하겠지만 처음가는 건물 등에서는 버튼을 찾느라 당황할 수 밖에 없고, 심지어 엘리베이터안 조명이 어두우면 정말 욕나오기 일수다.

시인성이라는게 색상의 대비정도도 있겠지만 1차적인 요소는 아무래도 명암대비이다. 그래서 위 사진을 흑백으로 바꾸어 보았다.

보이시는가? 버튼 안쪽을 무광처리하면서 오목하게 만들다보니 반사광의 각도에 따라 심한 경우에는 글자가 아예 보이지가 않는다.

게다가 약간 어이없는게, 금속재질에 타공을 해서 숫자를 만든게 아니라 플라스틱 수지에 금속코팅을 해서 만들다보니 자꾸 손으로 누르게 되면 금속코팅이 지워져서 숫자를 알아보기 힘든 경우도 있다.

더욱 심한 케이스를 보여주면 다음과 같다. 같은 제조사의 고층용 제품으로 보인다.

죽이지 않는가. 보자마자 욕이 올라온다. 이걸 어떤 생각으로 디자인한 건지 진짜 모를 일이다. 점자를 안다면 맹인용 점자로 파악하는게 더 빠를지도 모르겠다.

세상의 모든 엘리베이터가 이렇지는 않다.

아래 버튼은 약간 구식이긴 하지만 시인성은 훨씬 좋다. 개인적으로는 위제품(T사로 보인다)이 시인성도 좋고 고급져 보인다.

경쟁기업에서도 이와 비슷한 버튼이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 평면 금속버튼에 후광글자를 넣어서 H사 것과 같이 시인성이 떨어지지는 않는다.

이 다자인의 가장 큰 문제점은 금속바탕에 흰색이 명도대비로 볼때 가장 시인성이 좋음에도 불구하고 발광시 붉은색을 내기 위해 번호색상을 벽돌색으로 하다보니, 켜졌을때는 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꺼져 있을때 명도차이를 떨어뜨려 시인성을 해치는 결과를 낳은 것이다. 이럴것 같으면 번호를 흰색으로 하고 백라이트를 붉은색 LED로 하면 훨씬 좋은 선택이 되었을 것이다.

……

여전히 내가 보아온 엘리베이터 버튼 중 산업은행의 푸른 백라이트버튼이 가장 보기좋은 버튼이었다 (게다가 버튼취소가 되는 가장 첫 엘리베이터였다). 엘리베이터 버튼이 별거 아닌지도 모르겠지만 그 건물을 접하게 되는 user experience중 매우 앞선 경험중 하나라는 점에서, 그리고 그것을 이야기하기전에 안전과 관련된 기계장비라는 점에서 좀더 세심한 배려가 있었으면 한다.

“주식회사 바로알기” 끝맺음을 해야할 것 같다. 어찌하면 주식회사가 당초의 아이디어대로 잘 돌아갈 수 있을까…

다시말하지만 주식회사는 소유가 목적이 아니라 소유와 경영간의 분리를 통해 이의 균형이 이윤극대화로 연결된다는 신념에서 비롯된 법인구조이다. 따라서 사업자에게 있어 소유가 중요한 이슈이고 계속 그 끈을 놓고 싶지 않다면 주식회사가 아닌 좀더 인적회사에 가까운 회사구조를 선택해야 한다.

아주 낮은 차원으로는 그냥 개인사업을 하던가 아니면 조합, 합자회사, 합명회사, 유한책임회사 등 제법 다양한 회사구조가 존재하며 국가도 이러한 다양한 회사구조가 적합하게 활용될 수 있도록 계도하고 교육시킬 필요가 있다.

따라서 주식회사를 하고자 한다면 절.대.로 그 회사가 “창업주의 것”이라 생각하면 안되며 사업주가 당초 제시하고 모든주주 (절대로 최대주주가 아니다)가 합의하는 방향으로 회사를 이끌어 나아가야 하며,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였을 때에는 (손실일 수도 있고 합의된 목표 미달성일 수도 있다) 회사가 좀더 합목적적으로 이를 달성할 수 있는 경영진으로 교체하여야 한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게 그가 만약 51%가 넘는 최대주주라면 어찌해야 하는가 이다. 아무리 blame을 해보았자 주총에서 경영자의 위치를 내어 놓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솔직히 나는 이런 형태의 주식회사는 올바른 형태가 아니라고 생각하며, 이럴꺼라면 애당초 다른 형태의 회사형태로 사업을 했어야 했다고 본다. 물론 주식회사라도 기업공개 이전까지는 나머지 주주들이 대부분 창업주와 이해관계자이거나 상당수준 회사와 창업주를 투자계약을 통해 콘트롤 할 수 있는 기관투자자들이기 때문에 큰 문제가 되지는 않겠지만 최소한 상장된 이후에는 Public company로써 소유와 경영이 완전히 분리되는게 주식회사의 기능을 극대화시키는 방법이고 그러기 위해서라도 당초 창업주의 지분은 적절히 분산되어야만 한다(이게 IPO의 여러 원칙 중 하나이며 이들 기업을 Public Company라 부르는 이유이기도 하다).

혹자는 이런 지분분산이 회사의 경영권을 불안하게 만들 수 있다고 한다. 웃기는 소리다. 주주들은 경영자가 뛰어나서 그를 선택한 것이지 그가 지분이 가장 많기 때문에 선택한게 아니기 때문이다. 대항해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사업주에게 자본가들이 돈을 대준 것은 그가 제시한 사업계획과 그의 능력 때문이지 그가 돈이 많기 때문이 아니었음을 상기해 보라. 돈 많았으면 투자자가 필요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때문에 그가 심지어 지분을 하나도 남기지 않았더라도 그가 그 회사를 가장 잘 운영할 수 있다면 그는 경영자로 남게 하는 것이 주주들의 결정이어야 한다.

그러니 제대로 사업을 하지 못하는 경영자들을 바꾸지 못하고 내버려두는 주주들은 결국 그가 그저 잘먹고 잘살라도 돈을 기부한 것과 다를 바가 없다.

뭐 이런걸 거창하게 주주행동주의입네 부르기도 하지만, 그냥 심플하게 내돈 가져간 놈이 재대로 일하고 있는지 지켜보라는 아주 간단한 논리이다. 이게 제일 중요하고 여기에서부터 모든 주식회사, 증권시장, 자본시장의 원리가 시작되는 것이다.

알다시피 미국 대부분의 기업들 중 2세가 기업경영을 이어받는 경우는 상장기업중에는 없는 것으로 알고 있고, 일본도 마찬가지이다. 물론 비상장기업중에는 아주 유명한 몇몇 기업들이 가족경영체제를 유지하기도 하지만, 그 내부에서는 일반기업들보다도 더 엄격한 경쟁의 룰이 적용되며 일부 기업은 마치 천국을 연상케 한다(데이터분석전문기업인 SAS가 대표적인 예이다)

그런데 왜 유독 우리나라만이 (물론 필리핀을 비롯한 정치후진국들이 꽤 많지만 그건 그들이 역시 후진국이라는 증명일 뿐) 이런 변칙적인 주식회사제도를 유지하게 되었는지는 앞서 설명한 한국만의 독특한 사회역사적 환경에 기인한 바가 큰 바, 이의 총체적 변화전에 주식회사제도의 올바른 운영을 기대하는 것도 사실 공염불일 것이다.

나름 가족경영의 독재적 시스템하에서 이루어온 플러스 요인이 없었다 할 수는 없겠지만 그렇지 않았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데에 아니요를 들이댈 증거나 논리도 없음은 매한가지이다. 하지만 우리보다 백년이상 앞선 주식회사제도를 이용하여온 선진국가들의 결론은 한가지이다. 원래 제도의 목적을 최대한 살리는 것이 그 제도를 가장 잘 활용하는 방법이라고. 그게 아니라면 벌써 없어졌을 제도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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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중3때 였던걸로 기억합니다.

당시 청소년이 볼만한 외화라는게 TV 주말의 명화를 제외하고는 그닥 풍족하지 못했던 시절이었고 마침 VTR이 막 보급되기 시작했던지라 “해적판” 비디오는 아직 국내에 개봉하지 않은 양질(?)의 신작외화를 접할 수 있는 보고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매드맥스도 그 통로로 처움 접하게 된(매드맥스 1은 당시 소문으로만 들어보았고 제가 처음 접한 매드맥스는 2편, The Road Warrior 였습니다.) 당시 어린 저에게는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충격적인 하드코어 액션 입문작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영화를 통해 맥스는 제게 있어 Road Warrior의 아이콘이 되었고, 이후 85년에 개봉한 Beyond Thunderdome은 자잘한 재미와 뭉클함이 함께했던 매드맥스 종결판으로 기억에 남아 있었습니다.

그랬던 매드맥스가 Fury Road로 돌아온다는 소식을 처음 접하고 가장 궁금했던 건 “이미 끝난 이야기로 알고 있었는데 무슨 할 이야기가 남았을까” 였습니다. 그것도 다른 감독이 아닌 매드맥스의 creator인 조지밀러가 말이죠…

그래서 오늘 아침, 과거 제가 받았던 과다한 충격을 고려하여 아이들 말고 혼자서 이를 확인하러 극장을 향했습니다.

Fury Road는 조지밀러가 창조한 매드맥스의 세계관을 그대로 이어가는 이야기이기도 하고, 리부팅이기도 하면서, 새로운 에피소드이기도 합니다.

예상했던 것보다 상당히 많은 부분을 매드맥스 2와 3에서 가져왔습니다. 새로운 전설의 땅을 찾아 떠나는 이들을 돕는다는 설정은 2/3를 관통하여 fury road에도 이어지고 있으며 탈출자들을 수송하는 대형유조트럭(2편), 젊은 (여자)아이들(3편), 눅스의 외모(3편), 난장이(3편)와 심지어는 아주 구체적인 장면 연출들 역시도 상당부분 재연되는 느낌을 많이 받습니다.

조금 다르다면 3편 썬더돔에서는 가장 귀중한 존재가 석유가 고갈된 세상에서 돼지분뇨로부터 가스를 얻는 기술을 가진 난장이 과학자인 반면, 퓨리로드에서는 아이를 낳을 수 있는 건강하고 젋은(게다가 헐 이쁘기까지 한) 여성들로 대체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퓨리로드가 그저 1/2/3편의 재탕인 것은 결코 아닙니다.

뭐랄까, 세편의 습작을 통해 자신의 지문이 잔뜩 묻어나는 하나의 완성판을 만들었다고 할까요, 그야말로 “역작”을 탄생시켰다고 봅니다.
퓨리로드를 관통하고 있는 주제는 “구원”입니다. 어찌 보면 모세의 출애굽기를 연상시키기도 합니다.(협곡파괴에서는 홍해가 떠오르더군요) 그런데 재미있게도 모세는 맥스가 아니라 퓨리오사(Furiosa는 스페인어 Furioso의 여성형으로 “격노한”의 뜻입니다) 입니다. 맥스는 그냥 지나가다 엮여버린 하느님 같아 보입니다. 하지만 세상은 물과 가솔린을 무기로 들고 있는 거짓신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맥스 또한 구원이 필요했습니다. 자신이 보호해주지 못한 아내와 딸에 대한 죄책감은 그를 끊임없이 괴롭히고 조롱합니다.

여기서 조지밀러는 깜찍한 반전을 선사합니다. 2/3편이 현실에서 도피하여 이상향으로의 여정을 이야기 했다면 퓨리로드에서는 맥스 스스로가 현실로 되돌아가 싸울 것을 제안합니다. 저 끝이 안보이는 소금밭 너머에는 그저 소금 밖에 없다고…, 이 모습은 과거의 죄책감과 악몽으로부터 멀리 도망치려고만 했던 맥스에게 이제는 맞서 싸워 이겨내만 벗어날 수 있다는 점에서 스스로를 구원하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 말없는 (진짜 몇마디 안합니다) 워리어는 전편에서와 마찬가지로 전설의 구원자가 됩니다.

퓨리로드의 가장 큰 덕목은 무엇보다 “우리가 보고 싶어하는 것들을 싱싱한 날것으로” 보여주었다는 점입니다. 틈을 주지 않으면서도 퍼팩트한 액션 시퀀스들은 가히 교범이라고 불릴만했으며 무엇보다 그 넓디 넓은 스크린을 무엇으로 채워야만 할지를 너무 잘 알고 “이쯤에서 니들 보고 싶은게 바로 이거였지?” 라고 펑펑 터뜨려주는 센스는 70세 노장의 교활함이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이 영화를 통해 여성성으로서의 환원, 극단적으로 부가 집중된 계급주의에 대한 경계 등등 교훈적 비판적 시각들이 회자되고 있습니다만 전 이영화가 오히려, 우리가 잊어버렸던 “진정한 영화의 미덕”을 깨우쳐주었다는 점에서, 그리고 70 고희의 나이에서 남들에게 보여 줘야하는 정점이라는 것은 꼴통 또라이 짓이 아니라 바로 이런 것임을 통쾌하게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제 엄지를 올려주고 싶습니다.

조지밀러 이 양반 진짜 멋집니다.

PS. 이 영화에서 인상깊은 몇가지를 꼽으라면 단연코 불뿜는 기타리스트와 긴 장대를 타고 휘엉청 공격하는 장면이라 하고 싶습니다. 도데체 이런 생각을 어떻게 해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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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스텔라와 관련된 워낙 많은 감상과 언급들이 올라온 뒤라 뜨뜨무리한 뒷북이 될런지도 모르겠습니다.

개인적으로 SF광이기도 하고 허접한 아마추어 천문가인지라 인터스텔라는 그냥 영화가 아니라 수십년에 한번씩오는 혜성과도 같은 “행사”였으니 당연 “영접”을 하고 “찬양” 해야할 대상이었습니다. 다행히 그 혜성은 제게 멋진 모습은 물론 긴 꼬리와 같은 여운을 남겼습니다.

아마추어천문가들이 별을 쳐다보는 이유는 꽤나 다양합니다만, 저는 항상 세상의 “궁극”이 궁금했고 이내 하늘에서 그 궁금을 풀 수 있으려나 하는 마음에 별을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이게 인터스텔라가 그리도 끌렸을 이유였나 싶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 글을 끄적이는 이유는 조금 다른데 있는데 그것은 바로 “놀란은 과연 이 영화를 통해 무엇을 말하고자 싶었을까” 입니다.
그리고 저는 그 답이 혹시 우주의 시대를 연 모든 개척자(Pioneer)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게 아닐까 생각되었습니다.

재미있게도 이 영화는 쿠퍼의 꿈, 자신이 테스트파일럿이었을 때 조정하던 레인저가 추락하는 꿈에서 시작됩니다. 즉, 쿠퍼의 꿈은 우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아스라져가는 지구는 이를 허락하지 않았죠. 어쩌면 쿠퍼의 악몽은 우주로 나아가고 싶었던 한 pioneer의 좌절에서 시작되었을지 모릅니다. 농부가 되어버린 비행사이자 엔지니어인 현실의 쿠퍼인게죠.

이런 쿠퍼의 아쉬움과 열망은 우연히 나타나 농장위를 날던 드론을 쫓는 장면에서 너무나도 확연히 들어납니다. 마치 어린아이가 종이비행기를 쫓듯, 너무나도 천진난만하면서도 행복해 보이는 쿠퍼를 보게 됩니다.

그러나 쿠퍼는 가족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너무나도 사랑하는 어린 딸 머피가 있죠. 하지만 그는 결국 딸의 곁을 떠나 우주를 향하게 됩니다. 과연 그가 인류의 미래를 책임져야 한다는 막중한 책임감 때문에 딸을 떠난 걸까요? 글쎄요. 저는 그것보다 혹시 쿠퍼가 자신이 잃어버렸던, 또는 잊혀졌던 꿈을 다시 이룰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모든 선구자들의 길이였으니까요.

이야기를 조금 돌려서 놀란이 영향을 받았던 영화중에 1983년 필립카우프만 감독의 “The Right Stuf”이라고 70년대 미국 우주비행사들과 초음속에 도전하는 테스트파일럿들의 실화를 기반한 영화가 있습니다. 아주 전형적인 pioneer들의 이야기인데 여기 나오는 핵심인물들은 모두 “스스로”의 한계를 깨기 위해 도전을 합니다. 국가나 미래가 아니고 말이죠. 이들이 가장 두려워 하는 것은 다시 비행을 하지 못하게 될 상황 뿐입니다.

쿠퍼도 마찬가지 입니다. 쿠퍼가 다시는 딸을 못볼지도 모른다는 리스크를 알면서도 쿠퍼와 가족을 뒤로하고 우주로 향했던 건, 바로 pioneer로서의 그의 본능을 이길 수 있는 건 이미 없었던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쿠퍼가 5차원의 공간에서 그리도 딸을 향해 오열했던 것도 그저 도전만이 pioneer의 본모습이라 믿어왔던 자신이 딸을 떠나는 모습을 다시 마주하게 되면서 너무도 미안하고 고통스러웠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쿠퍼는 자신을 보고 울부짖죠. “Stay”라고 그냥 농부로 남아 머피와 함께 있으라고 말이죠.

하지만 쿠퍼는, 모든 pioneer들이 늘 그래왔듯이 답을 찾아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그는 또다른 도전을 시작합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놀란이 말하고 싶었던게 아니었을까요?

어쩌면 인터스텔라는 우주를 향했던 세상의 모든 pioneer들에게 바치는 헌정일런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