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d-Max-5

Screen-Shot-2015-03-27-at-9.05.47-AM-620x400

Screen-shot-2015-03-31-at-12.34.29-PM-620x400

mad-max-fury-road-vehicles
아마 중3때 였던걸로 기억합니다.

당시 청소년이 볼만한 외화라는게 TV 주말의 명화를 제외하고는 그닥 풍족하지 못했던 시절이었고 마침 VTR이 막 보급되기 시작했던지라 “해적판” 비디오는 아직 국내에 개봉하지 않은 양질(?)의 신작외화를 접할 수 있는 보고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매드맥스도 그 통로로 처움 접하게 된(매드맥스 1은 당시 소문으로만 들어보았고 제가 처음 접한 매드맥스는 2편, The Road Warrior 였습니다.) 당시 어린 저에게는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충격적인 하드코어 액션 입문작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영화를 통해 맥스는 제게 있어 Road Warrior의 아이콘이 되었고, 이후 85년에 개봉한 Beyond Thunderdome은 자잘한 재미와 뭉클함이 함께했던 매드맥스 종결판으로 기억에 남아 있었습니다.

그랬던 매드맥스가 Fury Road로 돌아온다는 소식을 처음 접하고 가장 궁금했던 건 “이미 끝난 이야기로 알고 있었는데 무슨 할 이야기가 남았을까” 였습니다. 그것도 다른 감독이 아닌 매드맥스의 creator인 조지밀러가 말이죠…

그래서 오늘 아침, 과거 제가 받았던 과다한 충격을 고려하여 아이들 말고 혼자서 이를 확인하러 극장을 향했습니다.

Fury Road는 조지밀러가 창조한 매드맥스의 세계관을 그대로 이어가는 이야기이기도 하고, 리부팅이기도 하면서, 새로운 에피소드이기도 합니다.

예상했던 것보다 상당히 많은 부분을 매드맥스 2와 3에서 가져왔습니다. 새로운 전설의 땅을 찾아 떠나는 이들을 돕는다는 설정은 2/3를 관통하여 fury road에도 이어지고 있으며 탈출자들을 수송하는 대형유조트럭(2편), 젊은 (여자)아이들(3편), 눅스의 외모(3편), 난장이(3편)와 심지어는 아주 구체적인 장면 연출들 역시도 상당부분 재연되는 느낌을 많이 받습니다.

조금 다르다면 3편 썬더돔에서는 가장 귀중한 존재가 석유가 고갈된 세상에서 돼지분뇨로부터 가스를 얻는 기술을 가진 난장이 과학자인 반면, 퓨리로드에서는 아이를 낳을 수 있는 건강하고 젋은(게다가 헐 이쁘기까지 한) 여성들로 대체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퓨리로드가 그저 1/2/3편의 재탕인 것은 결코 아닙니다.

뭐랄까, 세편의 습작을 통해 자신의 지문이 잔뜩 묻어나는 하나의 완성판을 만들었다고 할까요, 그야말로 “역작”을 탄생시켰다고 봅니다.
퓨리로드를 관통하고 있는 주제는 “구원”입니다. 어찌 보면 모세의 출애굽기를 연상시키기도 합니다.(협곡파괴에서는 홍해가 떠오르더군요) 그런데 재미있게도 모세는 맥스가 아니라 퓨리오사(Furiosa는 스페인어 Furioso의 여성형으로 “격노한”의 뜻입니다) 입니다. 맥스는 그냥 지나가다 엮여버린 하느님 같아 보입니다. 하지만 세상은 물과 가솔린을 무기로 들고 있는 거짓신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맥스 또한 구원이 필요했습니다. 자신이 보호해주지 못한 아내와 딸에 대한 죄책감은 그를 끊임없이 괴롭히고 조롱합니다.

여기서 조지밀러는 깜찍한 반전을 선사합니다. 2/3편이 현실에서 도피하여 이상향으로의 여정을 이야기 했다면 퓨리로드에서는 맥스 스스로가 현실로 되돌아가 싸울 것을 제안합니다. 저 끝이 안보이는 소금밭 너머에는 그저 소금 밖에 없다고…, 이 모습은 과거의 죄책감과 악몽으로부터 멀리 도망치려고만 했던 맥스에게 이제는 맞서 싸워 이겨내만 벗어날 수 있다는 점에서 스스로를 구원하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 말없는 (진짜 몇마디 안합니다) 워리어는 전편에서와 마찬가지로 전설의 구원자가 됩니다.

퓨리로드의 가장 큰 덕목은 무엇보다 “우리가 보고 싶어하는 것들을 싱싱한 날것으로” 보여주었다는 점입니다. 틈을 주지 않으면서도 퍼팩트한 액션 시퀀스들은 가히 교범이라고 불릴만했으며 무엇보다 그 넓디 넓은 스크린을 무엇으로 채워야만 할지를 너무 잘 알고 “이쯤에서 니들 보고 싶은게 바로 이거였지?” 라고 펑펑 터뜨려주는 센스는 70세 노장의 교활함이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이 영화를 통해 여성성으로서의 환원, 극단적으로 부가 집중된 계급주의에 대한 경계 등등 교훈적 비판적 시각들이 회자되고 있습니다만 전 이영화가 오히려, 우리가 잊어버렸던 “진정한 영화의 미덕”을 깨우쳐주었다는 점에서, 그리고 70 고희의 나이에서 남들에게 보여 줘야하는 정점이라는 것은 꼴통 또라이 짓이 아니라 바로 이런 것임을 통쾌하게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제 엄지를 올려주고 싶습니다.

조지밀러 이 양반 진짜 멋집니다.

PS. 이 영화에서 인상깊은 몇가지를 꼽으라면 단연코 불뿜는 기타리스트와 긴 장대를 타고 휘엉청 공격하는 장면이라 하고 싶습니다. 도데체 이런 생각을 어떻게 해냈는지…

6a00d8341bfb1653ef01a511ba63de970c-christopher-nolan-s-interstellar-scientific-vision-makes-revolutionary-movie

인터스텔라와 관련된 워낙 많은 감상과 언급들이 올라온 뒤라 뜨뜨무리한 뒷북이 될런지도 모르겠습니다.

개인적으로 SF광이기도 하고 허접한 아마추어 천문가인지라 인터스텔라는 그냥 영화가 아니라 수십년에 한번씩오는 혜성과도 같은 “행사”였으니 당연 “영접”을 하고 “찬양” 해야할 대상이었습니다. 다행히 그 혜성은 제게 멋진 모습은 물론 긴 꼬리와 같은 여운을 남겼습니다.

아마추어천문가들이 별을 쳐다보는 이유는 꽤나 다양합니다만, 저는 항상 세상의 “궁극”이 궁금했고 이내 하늘에서 그 궁금을 풀 수 있으려나 하는 마음에 별을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이게 인터스텔라가 그리도 끌렸을 이유였나 싶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 글을 끄적이는 이유는 조금 다른데 있는데 그것은 바로 “놀란은 과연 이 영화를 통해 무엇을 말하고자 싶었을까” 입니다.
그리고 저는 그 답이 혹시 우주의 시대를 연 모든 개척자(Pioneer)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게 아닐까 생각되었습니다.

재미있게도 이 영화는 쿠퍼의 꿈, 자신이 테스트파일럿이었을 때 조정하던 레인저가 추락하는 꿈에서 시작됩니다. 즉, 쿠퍼의 꿈은 우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아스라져가는 지구는 이를 허락하지 않았죠. 어쩌면 쿠퍼의 악몽은 우주로 나아가고 싶었던 한 pioneer의 좌절에서 시작되었을지 모릅니다. 농부가 되어버린 비행사이자 엔지니어인 현실의 쿠퍼인게죠.

이런 쿠퍼의 아쉬움과 열망은 우연히 나타나 농장위를 날던 드론을 쫓는 장면에서 너무나도 확연히 들어납니다. 마치 어린아이가 종이비행기를 쫓듯, 너무나도 천진난만하면서도 행복해 보이는 쿠퍼를 보게 됩니다.

그러나 쿠퍼는 가족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너무나도 사랑하는 어린 딸 머피가 있죠. 하지만 그는 결국 딸의 곁을 떠나 우주를 향하게 됩니다. 과연 그가 인류의 미래를 책임져야 한다는 막중한 책임감 때문에 딸을 떠난 걸까요? 글쎄요. 저는 그것보다 혹시 쿠퍼가 자신이 잃어버렸던, 또는 잊혀졌던 꿈을 다시 이룰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모든 선구자들의 길이였으니까요.

이야기를 조금 돌려서 놀란이 영향을 받았던 영화중에 1983년 필립카우프만 감독의 “The Right Stuf”이라고 70년대 미국 우주비행사들과 초음속에 도전하는 테스트파일럿들의 실화를 기반한 영화가 있습니다. 아주 전형적인 pioneer들의 이야기인데 여기 나오는 핵심인물들은 모두 “스스로”의 한계를 깨기 위해 도전을 합니다. 국가나 미래가 아니고 말이죠. 이들이 가장 두려워 하는 것은 다시 비행을 하지 못하게 될 상황 뿐입니다.

쿠퍼도 마찬가지 입니다. 쿠퍼가 다시는 딸을 못볼지도 모른다는 리스크를 알면서도 쿠퍼와 가족을 뒤로하고 우주로 향했던 건, 바로 pioneer로서의 그의 본능을 이길 수 있는 건 이미 없었던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쿠퍼가 5차원의 공간에서 그리도 딸을 향해 오열했던 것도 그저 도전만이 pioneer의 본모습이라 믿어왔던 자신이 딸을 떠나는 모습을 다시 마주하게 되면서 너무도 미안하고 고통스러웠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쿠퍼는 자신을 보고 울부짖죠. “Stay”라고 그냥 농부로 남아 머피와 함께 있으라고 말이죠.

하지만 쿠퍼는, 모든 pioneer들이 늘 그래왔듯이 답을 찾아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그는 또다른 도전을 시작합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놀란이 말하고 싶었던게 아니었을까요?

어쩌면 인터스텔라는 우주를 향했던 세상의 모든 pioneer들에게 바치는 헌정일런지도 모릅니다.

이정환씨가 강수돌교수와 같이펴낸 “한국경제의 배신”…
이하는 신문에 실린 책소개이다. 이미 다 아는 이야기이지만 함사보고싶은… 하지만 답이 없어 보이는… 하…

“밤에는 잠 좀 자자.” 현대자동차에 주간 2교대제가 도입된 뒤에도 노동조합에서는 주말 밤샘 특근을 하게 해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노동시간 단축을 외칠 때는 언제고 노조가 나서서 더 일하게 해달라고 아우성이다. 최대 두 배까지 더 받을 수 있는 특근 수당 때문인데 사실 누가 이들을 나무랄 수 있겠는가. 강수돌 고려대 경영학과 교수는 “아직도 갈 길이 멀다”고 말한다.

“우리가 열심히 공부하고 또 열심히 일하는 까닭도 모두 행복하게 살려고 하는 것인데, 단순히 수당을 좀 더 벌기 위해 자신의 건강을 좀먹는 일도 마다 않는 것, 아니 그것을 적극 얻어내기 위해 파업까지 하는 것은 자가당착적인 일이 아닐까요?”

강수돌 교수는 ‘한국경제의 배신’에서 “‘(아직 살아) 있을 때 더 벌자’라는 IMF 시절의 트라우마가 굉장히 강렬하게 작용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평생직장’이라고 믿어왔던 회사나 노조도 믿을 수 없고, 오직 나 자신밖에 없다는 절박한 생존 본능이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강 교수는 “무한 이윤을 추구하는 자본이 가진 유일한 무기가 (노동자를 상대로 한) 경쟁과 분열이라면, 그에 맞서는 노동자의 유일한 무기는 단결과 연대”라고 강조한다. “‘살아 있을 때 더 벌자’가 아니라 ‘인간다운 삶을 위해 같이 나서자’가 노동자다운 구호”라는 이야기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너는 아빠처럼 이렇게 힘들게 살지 말아라”라는 소망, “아파트를 제대로 한 채 장만하자”라든가, “자동차를 좀 더 좋은 걸로 장만하자”라든가 하는 소박한 욕망. 강 교수는 “인간과 자연의 생명을 한없이 빨아먹어야만 자기 몸집을 불릴 수 있는 속성이 바로 자본의 근원적인 문제”라고 지적한다. 강 교수는 “궁극적으로 자본의 무한 탐욕을 바로잡으려면 기업이나 경제를 노동자가 주인의식을 갖고 스스로 통제하거나 조절할 수 있는 정도로까지 나가야 한다”고 강조한다.

–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소득 상위 10분위와 하위 10분위의 임금 격차는 2001년 4.81배에서 2012년 5.25배 수준까지 오히려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 OECD 통계연보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노동시간은 2011년 기준 2090시간으로 OECD 최장이다. 미국은 1704시간, 일본은 1728시간, 독일은 1406시간으로 우리보다 적다.

– 자살률은 인구 10만 명 당 21.5명으로 평균 11.7명의 거의 두 배나 되고 여성 자살률은 13.2명으로 1위, 남성 자살률은 32.0명으로 헝가리에 이어 2위다.

– 사회공공연구소에 따르면 2009년 기준으로 우리나라 가계 운영비 가운데 사회임금이 차지한 비중은 7.9%에 지나지 않는다. OECD 평균은 31.9%다. 스웨덴은 48.5%다.

– 노동소득분배율이 외환위기 이전인 1996년 64.2%로 고점을 찍은 뒤 꾸준히 줄어들어 2012년에는 59.7%를 기록했다.

– 유가증권시장의 10대 그룹 소속 12월 결산법인 69개사의 2012년도 유보율이 1441.7%로 집계됐다. 2008년 말보다 무려 517.8%포인트나 늘어난 규모다.

신자유주의자들은 “일단 뛰어라, 잡아먹히고 싶지 않으면 무조건 뛰어라”고 말한다. 경제성장과 자유무역이 빈곤을 퇴치하는 최선의 수단이고 포식자에게 잡아먹히지 않으려면 최소한 포식자의 진화와 같은 속도로 진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정환 미디어오늘 기자는 이 책에서 “성장의 한계가 본격화하자 자본의 도피와 내부 착취가 구조화하고 있다”는 사실을 폭로한다. “성장의 한계나 폐해가 아니라, 그게 처음부터 ‘성장’이 아닐 수도 있다”는 지적이다. 이 기자는 “경제성장이 설비 투자로 이어지고 고용을 창출할 거라는 막연한 믿음, 그래서 성장이 곧 부의 분배와 확산으로 이어질 거라는 오래된 믿음이 깨지고 있다”고 경고한다.

강수돌 교수는 “‘제발 살려 달라’고 바짓가랑이를 붙들 일이 아니라 정신을 단단히 차리고 단결해서 ‘그래, 좋다. 그러면 당신이 가진 것 내놔라. 우리가 직접 해보마’ 이렇게 나서야 한다”고 제안한다. “삶의 논리와 돈의 논리가 충돌할 때 일관되게 삶의 논리로 가야 하는데, 돈 앞에서 속으로 웃어버리면 이미 진 거나 마찬가지”라는 이야기다.

강 교수의 주장은 이 한마디로 요약된다. “우리가 필요한 것은 (개별로 중산층이 되는) 돈이 아니라 (더불어 행복한) 삶이다.”

강 교수는 “주체의 의식 변화는 투쟁 속에서, 실패의 성찰 속에서, 삶의 원리를 학습하는 과정 속에서 다양하게 이뤄질 수 있다”고 강조한다. “출발점은 ‘현재의 내 삶이 행복한가? 현재 우리 사회가 행복한가?’ 하는 질문들이 돼야 한다”는 이야기다.

이 기자도 “시장은 절대 저절로 무너지지 않는다”고 강조한다. “시장만능주의를 비판하는 것을 넘어 시장만능주의가 작동하는 방식을 깨부숴야 변화를 끌어낼 수 있다”는 이야기다. “장기적으로는 복지국가가 대안이 되겠지만 이를 추동할 정치세력을 형성하는 것이 우선돼야 한다”는 게 이 기자의 주장이다.

강 교수는 이 책에서 ‘자기파업(self-strike)’을 해법으로 제시한다. 자본가를 대상으로 하는 게 일반적인 파업이라면, 여기서 말하는 자기파업은 나를 상대로 한 파업이다. 다람쥐 쳇바퀴 도는 식의 무의미한 삶을 잠시 멈추고 멍하니 산길을 걸으며 자신의 삶을 근본적으로 되돌아보라는 제안이다. “‘자기파업’이라는 나에 대한 부정은 실은 진정한 나에 대한 긍정이 될 수 있다”는 설명이다.

강 교수는 이 책에서 경제 민주화라는 형해화된 개념을 새로 규정한다. 강 교수는 “경제민주화란 일하는 모든 사람들이 ‘왜 우리는 열심히 일하는가?’라는 근본적 문제를 스스로 던지며 삶의 진정한 주체로 거듭나는 것을 출발점으로 해서 그런 주체성을 억압해온 각종 사회 구조를 타파해 완전히 새로운 구조를 만들자는 논의이자 연대운동이어야 한다”고 정의한다.

“아무도 부자가 되지 않으려 한다면 모두 부자가 될 것이고, 모두 가난해지려 하면 누구도 가난해지지 않을 것이다.” 강 교수가 인용한 피터 모린의 말에서 대안적 경제 민주화와 고르게 사는 사회를 위한 상상력의 뿌리를 찾을 수 있다.

“아이들이나 어른들이나 진정으로 스스로의 삶에 대한 주체성이 결여된 상태에서 오로지 사회의 상층부가 제시하는 돈과 권력의 논리만 추종하다가 헛된 삶을 사는 꼴이고 이런 ‘객체화된 인생’을 벗어나지 않는 이상, ‘경제민주화’도 말짱 도루묵이 될 것”이라는 경고다.

이 기자는 경제 민주화를 “시장에 대한 민주적인 통제”라고 규정한다. “자유방임의 시장이 민주주의를 위협해서는 안 된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해서 필요하다면 정치가 경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는 의미로 읽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이 기자는 그래서 “재벌 개혁도 중요하지만 고용 없는 성장과 소득 불평등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 경제민주화는 의미가 없다”고 지적한다. “복지 전망이 없는 경제 민주화는 거짓이고 비정규직 문제를 돌보지 않는 경제민주화는 위선이고 기만”이라는 이야기다. 이 기자는 “순환출자 금지나 출자총액제한제도 부활, 금산분리, 지주회사 요건 강화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최저임금 인상과 비정규직 정규직화, 그리고 노동자의 경영 참여 확보”라고 강조한다.

이 기자는 “재벌 해체가 답이 아닌 것처럼 막연하게 재벌의 선의에 기대는 것도 대안이 될 수 없고 경제 민주화의 함정을 경계하되 주주자본주의의 한계를 극복하는 대안을 모색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분명한 것은 시장의 탐욕을 규제하고 게임의 법칙을 바로잡는 일이 정부의 역할이고 책임”이라는 이야기다.

강 교수는 경제 민주화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이유를 다음 세 가지로 정리한다.

첫째는 소유 및 생산의 측면으로, 생산수단과 노동력이 분리되어 있기 때문이고, 둘째는 분배의 측면으로, 갈수록 사회 양극화가 심해지기 때문이다. 셋째는 주체의 측면으로, 그동안 민초 자신이 그 고유의 인간적 심성을 잃고 기득권의 심리 구조, 즉 돈과 권력에 대한 욕망을 그대로 내면화했기 때문이다.

강 교수는 “경제 민주화는 객관적 구조의 변화일 뿐 아니라 우리 자신의 삶에 대한 재성찰, 즉 ‘나부터’ 혁명으로 시작해서 ‘더불어’ 혁명으로 완성된다”고 강조한다.

“상류층은 기득권을 누리면서 중독돼 가고, 중하층은 기득권을 동경하면서 중독되어 갑니다. 향유중독과 동경중독, 이 양대 중독이 사람들의 디엔에이(DNA)를 바꿔 버려요. 주체의 ‘탈주체화’가 이뤄진 셈이죠. 역사적, 사회적 과정에서 자본에 꼭 필요한 사람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 결과 우리는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 사이에 맺었던 본연의 관계를 상실한 채 오로지 남보다 ‘더 빨리, 더 높이, 더 많이’라는 중독적 구호 속에 자기도 모르게 빨려 들어가고 있는 거죠.”

“하나는 저항과 협상의 측면, 다른 하나는 대안 형성의 측면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사실상 이 둘은 동시에 이뤄져야 바람직합니다. 또, 그 과정에서 구조는 행위에 제약 요인이 되기도 하지만 새로운 행위를 낳는 조건이 되기도 하겠죠.”

강 교수는 “더 이상 죽임의 경제가 아니라 살림의 경제를, 더 이상 경쟁과 분열의 경제가 아니라 소통과 연대의 경제를 아래로부터 구축해나가야 한다”고 강조한다. 강 교수와 이 기자는 “교육과 경제, 노동과 생명 등 삶의 전반적 과정을 근본적으로 혁신해야 진정으로 고르게 더불어 사는 사회가 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린다.

한국 경제의 배신 / 강수돌·이정환 지음 / 굿모닝미디어 펴냄 / 1만5800원. (알라딘) (교보문고)

r14

젋은 세대들에게는 세계 4대 뮤지컬로, 우리세대에게는 “장발장”으로 더 잘 알려져 있는 빅토르위고의 이작품을 언급할 때마다 우리는 매번 “빵”과 “은촛대”를 연상하곤 한다.
프랑스 대문호의 대표작이자, 대작이자, 명작인 레미제라블(“Les Miserables”, 번역하면 “가난한 이들”, “비참한 이들”)을 허리 뭉퉁 잘려지고 그저 도덕책 “차카게 살자!”의 교훈으로 밖에는 기억하지 못하는 이유는 단순히 세대들이 갖는 정보의 비대칭성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1862년 첫 출간되었고, 수많은 이들에게 영감과 감동을 안겨주었던 이 프랑스 대서사시는 1985년 뮤지컬로도 만들어져 지난 2010년 25주년동안 40여개국이 넘는 나라에서 20여개의 언어로 공연되어 전세계 팬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으며, 이윽고 올 크리스마스에 뮤지컬 영화로 개봉될 예정이라고 한다. (레미제라블은 가깝게는 1998년 리암니슨 아저씨 주연에서부터 무려 20번이 넘게 영화화 되었다)

Kings Speech에서 차분한 연출력을 보여준 톰후퍼 감독의 지휘 아래 휴 잭맨(장발장), 앤 해서웨이(팡틴), 러셀 크로우(자베르 경감) 아만다 사이프리드(코제뜨) 등이 감동있는 연기를 펼칠 예정인데, 재미있는 사실은 이 영화의 원작이 소설보다는 뮤지컬에 두고 있어서 (뮤지컬에서는 버벌없이 모두 노래로만 이루어져 있다), 이들 출연진들의 뛰어난 노래실력을 감상할 수 있다는 것 또한 색다른 매력이 되지 싶다.

 

r4하지만 이 모든 것들을 떠나 레미제라블의 진정한 미덕은 원작자 빅토르위고의 가난한 이들을 향한 따듯한 사랑과 연민, 그리고 자유와 정의를 향한 끊임없는 의지, 즉 시대를 뛰어넘는 휴머니즘을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18세기말 시작된 프랑스혁명으로 봉건의 종말과 새로운 세상을 기대했던 하층민들은 아이러니하게도 신흥부르조아지들의 착취라는 얼굴만 바뀐 새로운 형태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그야말로 “비참한 삶”을 이어가게 되는데, 이야기는 바로 이 “비참한 이들”과 이런 시대에 저항하는 용기 있는자들의 기록인 셈이다.

r2

r8

해서, 추측컨데 지난 7,80년대 대다수의 국민들에게 레미제라블에 대한 기억이  “쟝발장과 은촛대”로 각인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어쩌면 이 이야기가 당시로서는 “불순하기 그지없는” “시민혁명”을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저 도둑놈 쟝발장이 착한 신부님 만나서 개과천선했고 이후로 돈 열심히 벌어서 시장됐다는 어쩌면 새마을운동과도 같은 이야기를, 시대가 들려주고 싶었던건 아니었을까…

r3

r9

그저 Trailer만 보고서도 이작품에 거는 기대가 지대한 것은 어쩌면 – 비록 다른 시대, 절대적 풍요의 시대를 살고 있다 말할 수 있겠지만 – 지금 우리의 암울한 시대상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배가 고파 빵을 훔쳤다는 이유만으로 19년 동안 감옥살이를 할 수 밖에 없었던 장발장이 또다시 배고픔을 이기지 못해 은촛대를 훔쳐야만 하는 시대… 미혼모라는 이유로 공장에서 쫓겨나 창녀의 길을 걸아야만 삶을 연명할 수 있는 팡틴 모녀를 기여코 감옥으로 보내야만 하는 사회 시스템… 이 버림받은 삶들이 그렇게도 찾고 싶어하는 건, 어쩌면 배부른 한끼의 밥이 아니라  희망이였는지도 모른다…

r6

r7

하지만, 희망은 바로 그 어둡고 비참한 심연에서부터 항상 싹튼다…  레미제라블은 그 포기하고 싶은 현실을 그려내는데 그치지 않고 이에 저항하고 싸우는 마리우스와 자유를 지키려는 이들을 등장시키켜 원망과 좌절만으로는 자유를 지켜낼 수 없음을, 그리고 그 투쟁이 만들어내는 역사라는게 반드시 올바른 길로만 가지는 않는다는 냉혹하고 가슴 아픈 현실을 일깨워 준다. Trailer에도 잠시 나오기도 하지만 프랑스 국기가 흣날리는 광장의 바리케이트 장면은 진정 가슴 뭉클하게 만든다… (바리케이트의 어원이 여기에서 나왔다고 한다)

r10

 

r12

혁명은 많은 것을 바꾼다… 하지만, 진정 세상을 바꾸는 것은 사랑, 그것도 “인간”에 대한 사랑이다.
레미제라블은 18/19세기를 대표하는 낭만주의 휴머니즘 작품이다.  낭만… 참 그리우면서도 아스라한 단어이다. 특히 혁명에서 베어나오는 낭만에는 다른 어떤것에서도 맡아볼 수 없는 독특한 감성의 냄새가 난다. 허나 요즘같이 살기 힘든 세상에서 낭만을 이야기하면 세상물정 모르는 덜떨어진 인간취급 받기 쉬우리라…

“낭만” 이란 단어를 국어사전에서 찾으면 다음과 같은 풀이가 나온다.  “실현성이 적고 매우 정서적이며 이상적으로 사물을 파악하는 심리 상태 “…  그래 맞는 말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상태를 부르는 또 다른 단어가 있다.

바로 “꿈”이다…

그저 웃어넘기지 말고 우리를, 그리고 미래를 좀더 사랑해보자. Fight . Dream . Hope . Love …

r11

les-miserables-2012-comparison-poster

영화 Trailer가 궁금한 분들은 여기(http://www.imdb.com/video/imdb/vi17146393/)를 눌러 보시라. 수잔보일이 불러서 많이 유명해졌던 I Dreamed a dream을 앤 헤서웨이의 애절한 목소리로 들을 수 있다.

율동공원 카페베네… 아이스드 아메리카노 맛이… 한마디로 우웩!!!
메이커 청소도 안했는지 썩은냄새까지…
큰 딸래미는 아이스크림… 나도 저걸로할껄…

20110410-022642

지난주 네이버 캐스트에 올라왔길래 흠…하고 들어 봤다고 헉! 하고 놀랐다. 3개의 라이브 캐스트 모두 출중했지만, 그중 “가려진 마음”은… 솔직히 놀랐다.

순딩이 같아 보이는 이 처녀가 2002년 유재하음악경연대회에서 은상을 받은 노래란다.
아래의 링크를 먼저 참조하기 바란다. 백견이 불여일문!

MUSIC VIDEO
ClubDay Live

서정성… 노래는 감성의 도구이다. 감성은 다분히 간접적이며 시적이다.
물론 “랩”이라는게 생긴 다음부터는 직설화법으로도 노래가 만들어지기는 하지만, 깊은 떨림은 여전히 긴 은유의 통로를 거쳐 들려오곤 한다.

임주연의 노래가 그랬다.


시간은 멀리 가네. 내 길은 날 뒤돌아보네
그대 어깨 뒤에 아주 바래지 않은 그리움.
웃음이 되었나, 눈물이 되었나
내게 준 그대 얼굴 말라버린 미소를 짓네

그대로 멈춰 바라보고 한번 웃어보고 날 달래고는 눈물
이제는 건너와 다시 가도 가려진 마음의 자리구나

어렵게 돌아서는 그 길에 널 놓아 두고서
다시 묻고 있네, 내 맘 가득한 너를 잊을까

가녀린 손 끝에 시간이 멈추어
스치듯 다시 너를 안았네 알 수 없는 텅 빈 웃음에
그대로 멈춰 바라보고 한번 웃어보고 날 달래고는

눈물 이제는 건너와 다시 가도 가려진 마음의 자리
그대로 멈춰 바라보고 한번 웃어보고 날 달래고는 눈물

이제는 건너와 다시 가도 가려진 마음의 자리구나

지난 이별에 대한 Visual 이라고나 해야 할까…
그 마음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가려져 있을 뿐…

마치 물이 흐르며 만들어내는 물결이 서로나 겹치면서 전혀 새로운 물결을 만들어 내듯, 작은 화음의 연결이 매 마디 마다 전혀 새로운 변화를 이끌어낸다.

어느 가을밤 일필휘지(?)로 써내려갔다는 그의 말로 미루어 볼 때, 경험담이 아닐까 싶다.
요즘 보기드문 서정적(심지어는 사변적일 정도로)가사에 차분하면서도 전혀 새로운 코드전개는 이노래의 드러난 장점이겠지만, 세련된 편성과 편곡 또한 노래의 제목과 같이 가려져 있는 보석이다.

요즘 홍대 클럽음악 Scene 의 흐름이 우연인지 필연인지 여성보컬 중심으로 잡혀져가는데에는 이런 서정성에 기여 하는 바 큰 것으로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반면 남성보컬은 단순함(주로 직설화법적인 것으로 보았을 때 랩에 가까운)에 호소?.. 물론 “보컬” 이야기이지 뮤지션 자체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어쨋거나 요조내, 타루내, 한희정이내 일명 “홍대 여신”이라는 유아적  호칭으로 모호의 정체성을 뻗쳐나가고 있는 여성 홍대씬(이제 “인디씬”이라는 말을 쓰기도 쑥스럽게 되어버렸다)이 어떻게 가지를 뻗어 나갈지 궁금하다…  (이것도 2007년에 나왔으니 이미 늦었을려나?)

 
PS: 이노랠를 들으면서 매우 새롭지만 분명 어디에선가 느꼈던 감성이라는 감이 왔지만 한참 동안 기억 해낼수가 없었다.  요즘들어 기억난건데, 재미있게도 부활의 “사랑할수록”이 그것이었다.
아마 도입부의 일렉기타의 에코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리뷰를 언제 쓰고 말았는지 기억이 희미하다. 어느날 짱공유에서 미드 리뷰 페스티발을 한다기에 언뜻 4월부터 시작되는 BSG Season4 소식이 떠올라 몇자 긁어 보았다.  많이 녹슬었네…

———
인간이란 무엇인가.

문명이 있은 이래 항상 철학의 궁극이었던 이 질문을 인간이 아닌 다른 그 무엇이 물어 왔다면, 과연 우리는 무엇이라 답할 수 있을까. 아니 우리는 이 질문에 답할 필요가 있는 것일까…

이제 BattleStar Galactica(이하 “BSG”)라는 SF 미드를 소개하는 이유를 그 질문에 대한 답으로 대신할까 한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멀고도 다른 은하의 코볼 행성계, 그곳에서 우리와 똑같은 또 다른 인류가 지구보다 앞선 눈부신 문명을 창조하였지만 그 창조물 중에 하나인 “사일런”이라는 로봇기계들의 배신으로 인류와 기계간의 끝 모를 전쟁이 “휴전”에 돌입한지 언 40년, 이제 박물관의 한켠을 차지할 우주전함 갈락티카의 퇴역식을 준비하는 아마다 함장과 선원들을 비추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로봇과 인간간의 전쟁, 우주전함, 이야기는 그 흔해 빠진 SF의 시작과 크게 틀리지 않다. 때문에 난 하마터면 내 기억 저편 아득히 잊혀가는 70년대의 BSG(21세기의 BSG는 20세기 오리지날의 리메이크이다)를 떠올리며 21세기의 BSG를 덮어버렸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5분이 지난 뒤 이건 내가 알고 있던 20세기 BSG가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물론 20세기 BSG에서는 볼 수 없었던 복제인간이라는 새로운 모티브가 등장하기는 하지만 이야기의 큰 줄기는 다르지 않다. 인간이 창조한 전투머신들이 인간을 배신하고 반란을 일으켜 (이때부터 인간들은 이 토스터기계들을 사일런이라 불렀다) 20년간의 전쟁을 치루었고, 이후 40년간의 휴전이 지속되던 어느날 사일런이 휴전을 깨고 12 콜로니 코볼 행성계를 기습하여 파괴하며, 고향별을 잃어버린 인류는 전설속 13번째 콜로니인 “지구”를 찾아 멀고 먼 여행을 떠나며 사일런은 이들을 말살하기 위해 추격한다.

하지만 “왜”라는 물음에 20세기와 21세기는 각기 다른 대답을 내놓는다.

사실 20세기 BSG는 대표적인 선악구도를 크게 벗어나지는 못한다. 망할놈의 토스터기계들이 우월한 종족인 인간을 말살시키기 위한 혈전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허나 21세기 BSG에서는 사일런과 인류를 같은 무게의 시선으로 바라본다.

뼈속까지 똑같은 모습을 가졌음에도 만들어진 인간 – 사실 아무리 진화된 로봇이라도 ‘깡통’에 감정이입을 요구하기 어려웠던지, 21세기의 사일런은 눈부신 진화(?)를 통해 그들중 일부는 마침내 인간의 모습을 갖는다. – 따위에게 구원은 존재할 수 없는 걸까? 신이 창조하지 않은 인간은 축복도 존중도 기대해서는 안되는걸까? 정치적 불가피성, 국민이 원하기 때문이라는  구실로 매일 매일을 불신과 반목으로 도배질 해대는 인간들은 과연 구원받을 가치가 있는 걸까… 과연 인간의, 인간다움의 정의는 무엇일까… 이런 수많은 물음들을 던지며 인류와 사일런은 모두는 구원의 장소인 지구를 향한다.

자못 일부에서는 미 백악관과 대통령을, 모세의 출애굽기를, 일부에서는 이슬람과 기독교간의 충돌과 구원의 문제를 연상시키곤 하나, 시종일관 인간 자신과 인간관계 본질에 대해 끊임없는 질문을 던지며 균형을 잃지 않는다.

1978년 오리지날의 기본구도와 등장인물들을 바탕하였지만 복제인간의 등장, 스타벅의 여성 설정 그리고 다른 수많은 조연급 캐릭터들을 매회 드라마의 중심으로 세움으로서 보다 풍부한 네러티브를 형성하였으며 특히 SF에서 기대하지 않을 수 없는 CG등 특수효과는 핸드헬드 캠코더의 불안전한 느낌을 우주전투씬에서 빼어나게 사용했던 영화 Serenity(또는 오리지날인 드라마 Firefly)를 연상케 한다.

2003년 12월 4부작 미니시리즈 시즌0를 Scifi 채널에서 방영한 것을 시작으로 2004.10 시즌1(13ep), 2005 시즌2(20ep), 2007.5 시즌3(20ep)를 종결했으며 Web released 번외판인 Battlestar Galactica-RAZOR가 2007.11월에 발표되었다. 마지막 시즌인 시즌4는 2008. 4.4 프리미어를 시작으로 2009년까지 방영될 계획이다. 금일(28일 현지기준) 시즌4 방영을 기념하여  Half-hour Special Commentary인 What the frak is going on/Revealed/The phenomenon을 TV 및 홈페이지에서 릴리즈한다고 한다.

2005년 타임지, 롤링스톤 선정 최고의 드라마의 영애를 차지하였고 사일런이면서 갈락티카 전투조종사로 고뇌하는 Sharon Boomer역을 한국계 캐나다 배우인 Grace Park이 맡아 로스트의 김윤진에 이어 코리안 우먼파워를 새삼 느끼게 해준다. 하지만 개인적인 편향일지 모르겠으나 그 어느 누구보다도 고령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카리스마와 따듯함을 잃지 않는 아마다사령관을 소화해낸 에드워드 올모스의 연기는 감탄을 넘어 존경의 마음을 품게 만든다.

필자의 취미는 천체관측(사실은 관측보다 망원경 만드는걸 더 좋아한다)이다. 비록 먹고살기 바빠 공들여 만들어 놓은 2개의 천체망원경이 창고에서 먼지와 놀고 있지만, 매번 BSG를 볼 때마다 창고 속 망원경을 꺼내 먼지를 닦아주곤 한다. 누가 알겠는가, 밤 하늘을 쳐다보면 스타벅과 아폴로가 지나가는 모습을 보게 될지…

ps1. 가끔식 올려버린 스샷이 드라마의 이해를 도울 수도 있겠지만, 가끔씩은 상당한 해악을 가져다줌을 뼈저리게 느끼곤 한다. 그래서 본인의 게으름에 대한 핑게로 스샷은 딸랑 맨 처음의 한장(Season4 의 시작을 알리는 사진이다)뿐이다.. 근데 이 하나의 사진이 가져다주는 메시지는 마치 BSG가 전해준, 전해주고 있는 그리고 전해줄 메시지를 함측하고 있는 듯하다.  혹시 다빈치의 최후에 만찬을 기억한다면 그 그림과 비교해보면서 캐릭터를 분석해 보면 또다른 재미를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가끔씩 이들의 창의력이 많이, 참 많이 부러워진다….

ps2. 보다 자세한 정보가 필요하면 다음을 참조하기 바란다.

Scifi.com : http://www.scifi.com/battlestar/home.html
Fox Channel : http://www.foxchannel.co.kr/program/program.asp?txtPgmCd=PG35
Wikipedia : http://en.wikipedia.org/wiki/Battlestar_Galactica
BSG Fan page : http://www.battlestargalactica.com/index.htm

Battlestar_stern
2008/03/30 15:56 2008/03/30 15:56